김시민장군은 1554년(명종 9년, 甲寅年) 음력 8월 27일(양력 9월 23일)에 충청도 목천현백전촌(木川縣 栢田村) 지금의 충남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 백전부락에서 父 김충갑(金忠甲)공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김충갑의 자는 서초(恕初)요 호는 구암(龜岩)이며 고려충신 충렬공 김방경(金方慶)장군의 12세손이다.
김시민 장군의 본관은 안동, 자는 면오(勉吾),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장군은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기골이 장대하였으며 병정놀이를 좋아하고 언제나 대장이 되어 지휘하였다. 8살 때 길가에서 병정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이때 마침 천안군수행차가 있어 수행원이 길을 비키라 하자 "한고을 사또가 감히 진중을 통과할 수 있느냐" 고 호령하면서 조금도 기가 꺽이지 않았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원님이 말에서 내려 장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큰 재목이구나"하면서 길을 비켜 지나갔다 한다.
9살때 일이다. 백전부락 입구는 백전천(지금의 병천천)이 굽이 돌아 흐르고 있었는데 이 백전천가에 물에 잠긴 바위가 있고 그 속에 큰 굴이 하나 있었으며 이 굴 속에는 큰 이무기 뱀이 살면서 수시 출몰하여 사람을 놀라게 하고 가축에 해를 끼치기도 하였다. 이때 장난꾸러기 소년 김시민은 이무기 퇴치를 궁리하였다. 뱀은 뽕나무활에 쑥대화살로 쏘아 없애 버렸다 한다.
충무공은 조선조 때 나라에 큰 공을 세운 무인들에게 사후(死後)에 조정에서 내린 시호(諡號)의 하나로서, 모두 아홉 분이 이 시호를 받았다. 지금까지 충무공하면 이순신장군만을 연상하게 되는데 이는 이순신장군의 업적이 그만큼 크고 역사에 미친 영향이 지대하기 때문에 마치 이순신장군의 대명사처럼 회자되었던 것이지 이순신장군의 고유명사는 아니다.